합작에 관심 가져주신 여러분들, 참여해주신 여러분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2023년 보내세요 :)
ESP 오프 리밋
by 내리 (twitter @wstarsrest)
주의: 키네시스와 유나의 로맨스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유나는 살며시 아지트로 들어가 불이 켜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바탕화면은 깨끗했다. 그러나 몇 번의 클릭
후 C드라이브에 저장된
몇 개의 코드를 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으로 열어보고 내용을 스윽 훑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이의 결과물은 아니었다. 제이는 이렇게 급하게 짠 듯한 꼬인 코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오직 키네시스.
더 스크롤을 내렸다. 외부 csv 파일이 링크되어 있었다. 파일 경로를 따라 엑셀로 열어보니 바람의 속도, 풍향, 조절 방식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유나가 바람을 다루는 데에 익숙해지기 위해 스스로 연습했던 자료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게 녹화가 되고 있었다고?
스크롤을 끝까지 내렸다. 주석으로 이렇게 달려
있었다.
// 이것으로 유나의 초능력은 상쇄할 수 있어. 이러면 유나도 그란디스까지는 못 오겠지.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키네시스의 발걸음
소리였다. 유나는 키네시스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유나는 왼쪽 팔목에 찬 시계를 벗어던졌다. 그저 답답함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짐작은
가고 있었지만 속상한 건 여전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키네시스가 들어왔다. 온몸에 상처를 입고, 왼쪽 다리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 비틀비틀 걸어왔다. 키네시스는 유나를 보자마자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아마 놀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유나, 있었구나. 미안해. 나 좀 누울게.”
키네시스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키네시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유나는 구급차를 부를까 고민하다가 예전에 저장한 연합의 연락처로 무전을 쳤다. 곧이어 연합에서 사람이 왔고 키네시스에게 여러
물약을 먹였다. 유나와 나인하트는 키네시스가 깨어나길 기다렸고 키네시스가 일어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키네시스 님께서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키네시스가 어려움을요?”
“말씀드리기 어렵겠지만, 제른 다르모어라는 자를
아십니까?”
“고대 언어의 종류인가요? 도서관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요.”
나인하트는 한숨을 쉬었다. 대적자 키네시스는 자신의 연인에게
이런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다고.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유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제른 다르모어는 생명의
초월자이자 새로운 악입니다. 그의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그란디스에서 학살을 일삼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어요. 그리고 키네시스 님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갔습니다.”
“앗아갔다고요? 그 아이는 대학도 겨우 합격했는데, 여기서 더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원래 봉인석이 있는 대적자라면 봉인석을 뺏어갔겠죠. 그러나 대적자인 키네시스 님에게는 봉인석이 없으니…. 무언가 다른 걸 뺏어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이죠?”
“초능력을 조절하는 능력,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인하트는
추측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가설들을 늘어놓았다. 유나는 한번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마나가 필요합니다. 키네시스
님에게는 PP라고 불리는 그것 말입니다. 그동안은 스킬을 사용하거나 확률을 통해 염동력을 쓸 수 있는 PP를 모았습니다. 제른 다르모어는 모두의 염원이 담긴 봉인석을 뺏어갈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키네시스 님에게 모두의 염원이란 무엇일까요.”
“역시, 세상을 지켜주리라는 믿음이겠죠.”
“그 믿음은 꺾이진
않았습니다. 어째서인지는 전혀 짐작되지 않지만, 초능력에서 어느 정도 통용되던 물리 법칙이 깨졌어요. 키네시스 님은 마법사지 않습니까. 그동안은 염동력을 PP로 사용했지만, 법칙이 깨지는
바람에 자신의 에너지까지 소비하기 시작했어요. 즉 현재 키네시스 님은 체력을 태워 싸우고 있습니다.”
“키네시스가요? 체력을요? 키네시스는 마법사에요.
체력이 낮고 방어율도 낮다고요. 그런데 체력을 태워서까지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세상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겠죠.”
나인하트는
유나에게 이런 상황이라며, 키네시스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아지트 밖으로 나갔다. 유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어떻게 키네시스가 자신의 몸까지 태워가면서 싸울 수가
있지.
순간적으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뒤돌아보니 창문이 열려 있었다. 유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키네시스에겐 봉인석이 없었어. 나도 마찬가지이고, 그 말은, 나도
키네시스를 대신해 싸울 수 있다는 이야기겠지.
키네시스. 매일 나만 구해지는 건 미안하잖아. 나도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날부터 유나는 키네시스의 아지트에서
바람을 다루는 능력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압으로 캔을 살짝 찌그러뜨리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기압을 변화시켜 작은 전선을 움직여 날씨를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키네시스를 깜짝 놀라게 해주자. 키네시스, 내가 널 도울게. 나는 너의 여자친구니까, 같이 살아남자. 같이 살아남아서, 꼭 세상을 구하고, 그리고….
생각이 안 난다. 그럼 그란디스에서도 잘 자, 키네시스.
-
깨어난 키네시스는 눈물 고인 유나 옆에 앉아 있었다. 나인하트는 키네시스가 깨어난 것을 보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라며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유나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한심한 말을 꺼냈다.
“괜찮아?”
키네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시계, 내 초능력을 없애려고 한 거였어?”
유나는 100일 선물로 키네시스에게서 ESP 리미터와 꼭
닮은 팔찌를 받았다. 마치 커플 팔찌와 같아서 정말 기뻤다. 아날로그 디자인이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지트에서도 늘 차고 다녔다. 심심할 때마다 키네시스와 함께 커플 팔찌 사진을 찍어
SNS에 자랑했다.
그 이후로 전혀 초능력을 쓸 수 없었다.
바람을 일으키려고 해도 아주 약한 산들바람이었다. 민들레 홀씨 하나조차 날릴 수 없었다. 기압을
변화시키는 일은커녕, 자연적인 바람에 나부끼는 학습지를 고정하기 위해서는 위에 필통을 올려놓아야 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유나는 초능력자가 아니게 되었다.
좌절하는 유나에게
키네시스는 언젠가 다시 초능력이 생길 거라고 위로했다. 어쩌면 하얀 마법사가 소멸한 이후로 하나둘씩 초능력이 사라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유나, 이렇게 된 거 프렌즈 월드에서 최선을 다해줘. 나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게.”
“응, 그래. 네가 원한다면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출튀도 도와줄 수 있어.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키네시스였다. 그런 키네시스를 유나는 믿었다. 언젠가 정말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돌아와, 평범하게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키네시스는 지금 눈앞에 반쯤
쓰러져 있었다. 의식이 돌아왔다고는 해도 오랫동안 치료가 필요할 것이라고 유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키네시스가 너무 걱정되지만, 초능력을 뺏어간 건 너무하잖아.
유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키네시스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 간섭으로 알아낸 속마음이 아닌, 정말 마음이 통한 것만 같았다. 유나의 의문에 대답하듯이 키네시스는
답했다.
“유나, 초능력을 뺏어간 건 아니야. 그걸 다시 빼면 원래대로의 초능력을 쓸 수 있어. 이런 짓을 벌여서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그란디스는
너무 위험한 곳이야. 난 네가 다치기를 바라지 않아. 제발 무사해줘.”
“키네시스 바보.”
“바보
맞지.”
항상 자신을 천재라고 칭하던 키네시스였다. 자신을 바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유나뿐이었다. 그리고 키네시스 자신도, 유나에 관련된 일이라면 정말 바보라고
생각했다.
유나가 대적자 일을 도와줄 것이라고는 한참 전부터 생각했다. 점점 바람을 다루는 능력도 익숙해지고 있었고, 가끔은 키네시스 자신이 못하는 스케일의 일도 할 수 있었다.
가끔씩은 유나가 자신 대신 초능력을 먼저 얻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유나를 그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었다. 잘못하면 악의만 남기고 모든 것을
추출당할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사흉에게 공격당해 정신력을 전부 잃을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키네시스 자신처럼 스스로를 깎아가며 전투를 진행해야 할 수도 있었다.
절대 유나를
그란디스에 보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내린 결정이었다. 100일을 기념해 ESP 리미터를 개조한 작은 손목시계를 만들었다. 살짝 염동력을 이용해, 유나가 만드는 바람의 방향을 상쇄시키는
기계였다. 분자 단위로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시계를 보고 환하게 웃는 유나를 보며 키네시스는 빌었다. 제발 유나가 무사하기를. 프렌즈 월드만은
안전하기를. 절대로 유나가 그란디스나, 아케인 리버나, 혹은 또 다른 위험한 곳에 가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데 들켰네.
유나가 키네시스를 와락 안았다. 키네시스의
다친 오른쪽 가슴에 통증이 전해져 왔지만 상관없었다. 키네시스도 유나를 살짝 안았다. 유나는 한참 동안 키네시스를 안은 채 울었다. 키네시스는 묵묵하게
받아주었다.
“키네시스, 나와 같이 무사해줘. 제발 같이 가게 해 줘. 널 돕고 싶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유나, 너의
능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란디스는 너무 위험해.”
“위험해도 상관없어. 우린 늘 위험해왔는걸. 하얀 마법사에게 내가 납치당한 적도, 네가 미궁에서
쓰러진 적도, 수시 면접에 늦을 뻔했던 적도 있었고, 또 갑자기 베어라는 사람이 이곳에 떨어진 적도….”
“미안해. 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함께라면 위험이 절반이잖아…. 키네시스, 나…. 이 시계 싫어. 200일에라도 제대로 된 걸 줘. 나도 싸우고
싶어. 제대로 된 리미터로 함께 싸우고 싶어.”
유나는 키네시스의 허락도 없이 시계를 풀어헤쳤다.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초능력을 쓰지 않은 사이에 제어 능력을
살짝 상실한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유나는 다시 시계를 찼다. 그런 유나에게 키네시스는 다가가서 시계를 손수 풀어주었다. 다시금 거센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회오리바람의 중심에 있는
것만 같았다.
키네시스는 유나를 잘 알고 있었다. 유나는 한 번 다짐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소중한 여자친구였다. 그러니까 프렌즈 월드에 머무르라고 해도
소용없겠지.
무엇보다 키네시스도 유나와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좋아, 유나. 내가 연합에게 말해놓을게. 일단 조력자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허락될 것
같아.”
“일단 나도 좋아. 하지만 네가 위험하다면 같이 싸울래.”
“당연하지. 내가 널 지킬
테니.”
“나도… 키네시스를 지킬 테니까.”
키네시스와 유나는 서로를 마주보고 다시 안아주었다. 한참 동안 느끼지 못했던
서로의 온기였다. 위험한 곳에 있더라도 앞으로는 계속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둘은 걱정 반 행복 반이었다. 그때 학생회 일은 모두 제이가 담당할 거라는 생각은 두 사람 모두 못했던 것
같다.
키네시스와 유나는 그렇게 오래오래 붙어 있었고, 아지트에 무심코 들어온 제이와 나인하트는 바로 문을 닫고 계단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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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디스에는 많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둘은 함께라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마인드로 싸우기 시작했다. 대학을 이미 합격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이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가끔 주고받았다. 정말 오랜 여정의 끝에, 아보리스에 다다른 둘이 있었다. 제른 다르모어와의 싸움을 앞두었지만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둘은 ESP 리미터를 사이좋게 해제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힘을 억제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프렌즈 월드의 초능력자니까.